다들 참고자료를 수집한다.
다들 목적을 위해 무언가 수집을 할 것이다.
기사면 기사, 논문이면 논문. 책이면 책.
나의 경우에는 일러스트를 참고자료로 수집한다.
나는 게임 컨셉아트 출신이며 지금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잘 그린 일러스트, 내가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공부를 위해 저장하게 된다.
잘 찾을 수 있도록 태그까지 넣어가며 관리한다.
나중에 분명히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결코 다시 보지 않는다.
문제는 수집한 것들을 다시 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림 그릴 때는, 그냥 Pinterest 등에 필요한 검색어를 입력해서 원하는 걸 그때그때 찾으면서 작업하는 편이다.
왜일까? 왜 기껏 모아놓고 참고하지 않는 걸까?
기껏 좋은 자료를 모아놓고, 정작 필요할 때는 보지 않는 것이 나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제텔카스텐 메모법으로 바뀌다.
그러다가 제텔카스텐을 만났다.
제텔카스텐은 지식을 모으고 관리하는 기법이다.
어느 정도 제텔카스텐에 익숙해지고 나서
‘정보’들을 압축해 ‘지식’으로 만드는 방법을 일러스트에 시도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그림의 지식 메모 실험
우선, 하드 속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던 참고 이미지 중 하나를 골랐다.
지식으로 만드는 방법 = 질문하기
정보를 지식으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질문을 던지면 된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았다.
‘이 일러스트가 날 이끌었던 매력이 무얼까?’
질문을 던지자 답이 보이다.
그렇게 질문하자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생물보다는 지형에 어울리는 짙은 그림자, 환경광으로 인해 푸른빛이 나는 그림자, 왜곡된 땅의 모습,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는 구름. 구름이 작게 보이는 건 카메라 각도 때문. 카메라 각도 때문에 구름이 작게 보이고, 그 덕에 오히려 문어가 크게 보이는구나! 등등.
질문을 던지고 답을 정리해나가자, 내가 이 일러스트에서 원하는 것도 명확해졌다.
바로 원근감을 이용해 거대한 생물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분석한 메모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제목 삼아 메모로 정리했다.
일러스트 한 장이 멋진 지식 메모가 되었다.
이렇게 하고 나자, 내 머릿속에는 원근감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기법 하나가 생겼다.
필요할 때 참고자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참고자료는 필요할 때 찾는 요소가 아니라, 이미 내 안의 있는 지식을 단단히 고정하는 지지대 역할로 바뀌었다.
참고자료를 모으는 이유를 깨닫다.
질문을 하고 나자 내가 이 일러스트를 모은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원한 것은 사실 이 일러스트 자체가 아니었다.
**‘원근감을 연출하는 방법’**의 노하우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모으는 데서 끝내버렸다.
알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답을 얻지 못한 나의 자아. 성장하지 못한 나. 그대로였다.
‘프로그래머의 뇌’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프로그래밍 측면에서 이야기한다.
문법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보는 것이다. 기억하려 애쓰기보다는 찾아보는 것만 계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프로그래밍 개념에 대한 인출 강도가 발전하지 않는 것이고 , 이 인출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외우는 대신 찾아보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당장 내가 노력해서 알기는 번거롭고. 당장 필요한 지식도 아니고.
그러니, 미래의 나. 실제 이 이미지가 필요할 나에게 미루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그것을 배우기보단, 그냥 자료를 찾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내 머릿속에 들어오길 바라는 자료를 모으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참고자료 수집 대신 지식을 메모하기
문어 일러스트로 지식 메모화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일러스트를 마구 모으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일러스트를 하나하나 분석해서 메모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변경했다.
물론, 그냥 모으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나에게 남는 것이 훨씬 많다.
그냥 수집이 곡식을 창고에 쌓으면서 내 배가 부르길 기대하는 것이라면, 지식 메모는 내가 직접 밥을 지어먹는 느낌이다. 더 힘들지만, 더 든든하다.
나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수집이 아니라, 메모였다.
창고 속 먼지투성이 참고자료를 지식으로 바꾸기
그저 모으기만 한 창고 속 참고 자료가 있다면,
분명 중요한 것 같은데, 저장한 뒤 한 번도 보지 않았다면,
그중 하나만 먼지를 털고 질문을 던져보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질문은 ‘내가 왜 이걸 수집했을까?‘이다.
이 질문은 사실 진짜 질문은 아니다. 진짜 질문을 이끌어내기 위한 메타 질문에 가깝다.
앞서 문어 일러스트의 질문이 ‘왜 수집했을까?‘로 시작되었지만, 진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원근감으로 거대한 생명체를 표현할 수 있는가?’ 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내가 이 것을 수집한 이유와 답. 그리고 진짜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 나를 성장시키는 것은 사실 이 질문과 답이며,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모아야 하는 보물들이다.
메모를 통해 질문과 답을 얻었다면, 관련 있는 질문끼리 가까이 배치해보자.
앞서 윌리엄 부게로 와 클림트의 사례처럼 다른 메모를 비교하고, 메모끼리의 관련성을 찾음으로써 또 다른 질문 =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러한 제텔카스텐의 특징을 니클라스 루만은 communicating with slipbox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의사소통을 위해 두 당사자가 동일한 비교 스키마를 사용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놀라움의 효과는 그렇지 않을 때와 메시지가 다른 가능성의 배경에 대해 무언가를 의미한다고(또는 유용하다고 믿을 때) 더욱 증가합니다.
For communication, we do not have to presuppose that both parties use the same comparative schema. The effect of surprise even increases when this is not the case and when we believe that a message means something (or is useful) against the background of other possibilities.
100장의 참고자료보다 하나의 메모가 더 강력하다.
여기서는 일러스트를 예를 들었지만, 사실 메모로 만드는 것은 그 당신이 보고 듣는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당신이 모으고 있던 책의 인용문, 유튜브 영상들, 팟캐스트, 일러스트, 회의록부터 지나가던 사람의 옷차림,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표정, 연인과의 대화, 아름다운 석양을 보고 찍은 사진, 읽고 있던 웹툰의 대사, 커뮤니티의 유머란 등.
당신이 어떤 감정에서든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무언가 들은 다들 어떤 질문의 답이다.
그 질문과 답은 ‘내가 왜 모았는가’를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질문하고 답을 메모하라. 질문은 귀찮고 번거롭지만, 하나의 질문이 100장의 참고자료를 모으는 시간과 노력보다 훨씬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