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자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타인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외부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을 주는 것이다.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을 묻고, 사후 조치를 확인시켜 주는 것.
유가족에겐 저런 시스템상의 종결이 완전한 종결이 되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안다.
다만 그런 종결이라도 있어야 개인적인 맺음을 향한 첫걸음이라도 뗄 수 있다.
그 걸음이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 계기는 될 수 있다.
우리의 애도는 무용한 것은 아니겠으나 유가족에게 그리 닿지는 않는다.
애도는 오히려 유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담한 내 마음을 위한 것일지 모르겠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이다.
지금은 책임자들이 유가족에게 앞다투어 애도와 위로를 건넬 때가 아니라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다.
- 이태원 참사에 대한 황석희 번역가의 글 中
2022년 10월 29일.
수년만에 있었던 할로윈의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
비좁은 골목에서 수많은 젊음들이 선 채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이 몇년도인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참사였다.
사고의 원인과 책임을 둘러싸고 고성이 오가고 있다.
이 소음의 끝에서 유족들은 어떤 결과를 받아들 수 있을까.
그 결과지에 어떤것이 적혀 있더라도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은
납득과 종결이다.
이 비현실적인 사고에 대한 규명.
최소한 머리로라도 지을 수 있는 매듭.
사람은 마치지 못한 것을 계속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잊지 못한다고 한다.
발목을 붙잡힌 채 질질 끌며 살아야 한다.
의식적으로라도, 설령 그것이 텅빈 선언이라도
종결을 가진다는 것은 그 족쇄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국가 애도기간 또한 애도보다 기한에 더 의의가 있을 수 있다.
애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종결을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임을 알아주기를.